어쩔 수 없음에 관하여

꽤 오랫동안 나는 내 삶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원하지 않는 것들을 없애려고 애썼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것들이 내 삶이나 내가 속한 이 세상 안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울한 감정을 없애려고 했고, 우울하지 않을 때는 또 우울해질까 봐 두려워했다. 2012년 봄에 내가 왜 그렇게 행복했던가를 하나하나 세면서, 그런 행복을 다시 느끼고 싶어했고 어째서 지금은 그 정도로 행복하지 않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때처럼 행복해질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슬퍼했다. 앞으로의 삶이 그만큼 행복하지 않을 거라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동시에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가족이, 친구가, 애인이 내 곁을 떠나지 않기를, 이 봄의 설렘이 사라지지 않기를, 철학책을 읽으면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지만 그래도 흥분되는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뜻이 맞는 동료들과 영상을 기획하고 찍으러 다니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내가 앞으로도 내내 행복하기를... 

오늘, 지금 이화사랑에 앉아 참치김밥을 먹고 있으니 그게 얼마나 헛된 바람이었던가 싶다. 모든 건 변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건 변하고 있다. 내 옆에 앉은 벗은 김밥을 다 먹어 가고, 누군가는 방금 이곳을 빠져나갔다. 나도 점점 이 글을 길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런 사소한 변화가 모여 시간이 한참 지나면 커다란 흐름이 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종종 학교에 오지만, 이제 이곳에서 내가 알던 누군가와 마주치리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는다. 나의 학우들은 모두 학교를 떠났다. 2200원 하던 참치김밥은 2500원이 되었고, 주연이와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치즈김밥은 이제 팔지도 않는다.

모든 게 변한다는 사실을 내가 몰랐던 건 아니다. 다만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따금 변화가 아름답다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우울, 차별...- 역시 나름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며 때론 아름답기까지 하다고 여겼다. 너무 싫으니까 그렇게라도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여전히 원치 않는 것들이 사라질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한다는, 우디 앨런의 기계를 갖게 된다면 주저 없이 머리에 쓸 것이었다.

요즘 난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 상담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결실이다. 대개 많은 것들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변화는 일어나고 상황은 주어지며 우울은 찾아온다. 그걸 종이 자르듯이 내 삶에서 싹둑싹둑 잘라낼 수는 없다. 고통은 피하려 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힘든 일을 외면하면, 고통은 외면한 댓가와 함께 더욱 크게 다가온다. 후폭풍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변화가, 주어지는 상황이, 우울이 아름답지만도 않다.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아도 여전히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일도 있고, 아무리 이해하려 애써도 이해되지 않아서 차라리 그냥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일도 있다. 내 간절한 바람과 달리, 모든 일에 언제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슬프다. 삶이 이렇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어쩔 수 없다. 내가 원치 않는 일들이 내 삶에 일어난다고 해서 그걸 제거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애쓴다고 해서 없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여기에만 몰두하면 그 바깥에서 굴러가고 있는 내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갑자기 우울한 감정이 든다고 해서 '내가 왜 우울할까, 우울한 게 싫다'는 생각을 계속해 봤자 우울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오늘은 좀 우울한 날이네...'라고 생각하면서 평소처럼 할 일을 계속할 때 우울은 좀더 빨리 사그라든다. 게다가 우울한 원인을 분석하면서 그 상황을 피하려고 하다 보면 할 수 있는 게 점점 적어진다. 예를 들어 애인과 헤어져서 우울하다고 해서 연애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면 나는 평생 연애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연애'에 '우울을 유발하는 것'이라는 낙인이 찍혀 버리는 셈이다. 새로 연애를 했을 때 더 행복할 수도 있는데, 이전에 우울했다고 해서 같은 행동을 했을 때 또 우울해진다는 보장은 없는데 말이다.

나는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내가 어쩔 수는 없다. 홍준표 같은 사람이 30%나 표를 얻어도, 어느 군인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징역살이를 하게 돼도, 어느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 당해도 내가 어찌할 수는 없다. 그 일을 안 일어나게 할 수도 없으며, 내가 보기 싫다고 귀 막고 눈 감고 산다고 해서 그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내가 원치 않는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세상의 일부이므로, 내 삶에 내가 원하지 않는 일 또한 계속 찾아 올 것이다. 싫은 걸 바꾸려고 새로운 선택을 하면 또 싫은 게 생긴다. 외로운 게 싫어서 가족과 같이 살게 되면 가족 내의 규범을 따라야 해서 귀찮아질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유학을 떠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지 못해 슬플 것이다. 언제나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 우디 앨런의 기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언제나 모두가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이따금 둘 모두 얻게 되기도 하지만 그건 그저 운이 좋은 경우일 뿐이다.

만일 오늘 내게 우디 앨런의 기계가 주어진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할까. 기계를 쓰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쓸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세계, 고통 없는 세계가 있다면 그리로 가고 싶은 건 여전하다. 나는 악마로부터 '네가 여태까지 살아 온 삶이 앞으로도 하나도 새로울 것 없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는 속삭임을 들은 차라투스트라처럼 살 용기는 없다. 차라투스트라를 통째로 옮겨 놓은 <컨택트>의 주인공처럼 살 자신도 없다. 나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지금 싫은 것이 어쩌면 미래에는 나아질 수도 있다고 희망하며 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제, 지금 싫은 것이 미래에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그 때는 또 새롭게 싫은 것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우디 앨런의 기계 같은 세상은 없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세계에 산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그저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슬프지만, 삶이란 원래 그런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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