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못 하는 발레리나 by 청순한 에스키모

발레를 시작한 지도 벌써 일 년이 훌쩍 넘었다. 이렇게 쓰면 꽤나 발레를 잘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바로 일주일 전에 시작한 사람이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발레를 정말 못 하는 발레리나이기 때문이다.

일 년을 했는데도 아직도 턴아웃이 안 되고, 스트레칭은 100도를 못 넘기고, 포인은 계속해서 안짱으로 할뿐 아니라 발끝까지 꽉 쥐면 자꾸 발바닥에 쥐가 난다. 턴아웃은 아마 앞으로도 쭉 안 될 것 같다. 이건 근육이 아니라 뼈의 문제 같다. 성인이 된 마당에 노력한다고 뼈 모양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턴아웃은 그냥저냥 포기해야겠지. 어쨌든, 난 정말 발레를 못 한다.

어제는 집앞 무용학원에 갔다. 원래 하던 곳이 잠깐 시간이 안 맞아서, 이번 달만 이 학원 쿠폰을 끊었다. 그리고 제일 낮은 반 수업을 듣고 있다. 내 스케줄이 들쑥날쑥해서 같은 요일 같은 시각에 못 가고, 다른 요일 다른 시각에 가다 보니 매번 선생님이 다르다. 수업 내용도 다르다. 그동안은 따라갈 만했는데, 어제는 아니었다. 분명 제일 낮은 반이라고 해서 들어간 건데 수업이 너무 어려웠다. 수강생 중에 내가 제일 못 했다. 그래, 사실 그건 익숙하다. 근데 어제는 너무 눈에 확 띄게 나만 못 했다. 바 워크 순서도 너무 복잡했고, 센터로 가니까 대멘붕... 제자리에서 하는 동작은 허둥지둥 따라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두 명씩 나와서 하는 동작이었다. 뭐랑... 글리사드랑.... 또 뭐 빠꾸뤼??? 인가? 무슨 제떼랑 연결해서 하는 거였는데, 선생님 시범을 보고 나는 '방금 뭐가 지나갔지?' 했다. 첫 스텝 이후로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난 글리사드도 아직도 제대로 못 한다. 이전에 다니던 곳에서 글리사드+아삼블레를 몇 번 했었는데, 아삼블레가 아니라 글리사드를 못 해서 그게 어려웠었다. 결국 난 두 명씩 서서 센터를 하는 내내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너무, 너무, 너무 창피해서 그냥 문을 열고 나가고 싶었다. 밤 수업이라 홀 밖에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낮 수업 때처럼 뒷 타임 사람들이 밖에서 몸 풀면서 이쪽을 쳐다보기라도 했다면 진짜 죽고 싶었을 것 같다. 내가 얼마나 못 했냐면, 선생님도 포기하고 나를 교정해 주지 않을 정도였다. 수업 끝나고, 울고 싶은 걸 참고 선생님께 스텝 알려달라고 했더니 한 열 개 중에 세 개를 알려주시며 이것만 계속 하라고 하셨다. 근데 오늘이 되니 벌써 또 글리사드를 까먹었다...

결국 너무 우울해서 어제 세 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사실 요새 내내 우울하다. 이건 발레 때문은 아니고 내 미래랑 연애 때문인데, 아무튼, 원래 어제 발레를 갔던 건 우울해서였다. 발레를 하는 동안에는 그나마 우울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고 발레를 하고 나면 뭔가 해 냈고 운동했다는 기쁨에 우울함이 좀 덜해진다. 그래서 어제 발레를 갔던 거였는데... 더 우울해지고 말았다. 젠장.

나는 원래 운동을 못 한다. 내가 가진 모든 능력 중에 신체를 움직이는 능력이 가장 구릴 것이다. 아기 때는 내가 하도 늦게까지 못 걸어서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할아버지가 날 병원에 데려가셨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는 수행평가 연습한다고 부모님과 함께 공원에 배드민턴 치러 갔다가, 내가 하도 못 하니까 답답해진 부모님이 나는 구석에 앉혀 두고 자기들끼리 치기도 했다. 못 하니까 안 하고, 안 하니까 더 못 한다. 남들 앞에서 운동할 일이 있으면 쪽팔림이 가장 앞선다. 그런 내가 발레를 일 년 넘게 하고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살면서 무슨 운동이든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해 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 재밌게 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어제 같은 날은 정말 힘 빠지고 창피해진다.

중고등학교 시절, 반에서 공부를 포기했던 친구들이 꽤나 있었다. 선생님이 뭘 물어보면 쩔쩔매며 창피해하고,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거나 잠을 자던 친구들.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하던 친구들. 이제 그 마음을 알겠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가 간다. 그 친구들에게는 선생님의 설명이 어제 발레 선생님이 스텝 밟던 거랑 똑같이 들렸겠지. 나는 어느 발을 어떻게 하는지조차 모르겠는데, 다른 수강생들은 몇 번 연습하더니 바로 따라하고 팔동작까지 해내던 걸 보고 얼마나 좌절스러웠는지 모른다. 기본을 알려 주면 응용문제까지 풀어 내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기본조차 이해를 못 하는 그 기분은 정말 비참한 거다. 아,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잠깐 영어과외 했던 학생도 생각 난다. 네가 대체 그 문제를 왜 틀리는지 이해 못 해 줘서 선생님이 미안했다......


아무튼, 나는 발레를 x나게 못 하는 발레리나지만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난 수학을 다른 과목보다 못 하는 편이었는데, 그래도 꾸준히 하면 중간은 갔다. 운동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했으면 기초는 했을텐데. 안타깝지만, 그러니 지금부터 하면 된다. 발레도 계속 하면 남들 많이 많이 늘 때 나는 조금이라도 늘겠지. 어쨌거나 처음보다 자세가 정말 좋아졌고, 팔근육도 힘 주면 보일 만큼 생겼고, 복근과 허벅지 안쪽, 바깥쪽 근육, 엉덩이 근육도 많이 생겼으니까. 어제 수업에서 내가 유일하게 제대로 따라갔던 게 있다면 바로 근력운동이었다. 흠, 어쩌면 나는 남보다 근육은 좀 잘 붙는 편일지도? 수업 끝나고 혼자 근육 만지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크킄.... 플리에 자세도 처음보다는 훨씬 좋아졌을 거다. 아마 그럴거야. 앞으로 여기다 가끔 발레 일기를 쓰려고 한다. 발레 못 하는 발레리나가 쓰는 발레 일기!

덧글

  • 2017/04/02 20:22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청순한 에스키모 2017/04/21 22:37 #

    이제 봤네요! 그쵸 더디긴 해도 변하니까요^^ 같이 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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