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빼앗긴다는 것 by 청순한 에스키모

어벤저스를 빼앗겼다. 햄식이를 빼앗겼다.
나는 마블 시리즈를 많이 좋아하는 편이었고, 크리스 헴스워스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리고 이제 탈덕을 했다. 아니, 탈덕을 당했다. 마블 시리즈가 얼마나 남성중심적, 백인중심적, 미국제국주의적인 시리즈인지는 두말하면 입이 아프니 그냥 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햄식이를 탈덕하게 된 경위나 써 볼까 한다. (마블 시리즈의 저러한 단점이 보이지 않는 분은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귀찮으니 그냥 뒤로 가시길. 그냥 구글이나 트위터 같은 곳에 검색을 좀만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 헴스워스는 잘못한 게 없다. 그런데 왜 탈덕을 하게 되었냐고? 앞의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그는 내가 탈덕하기 전에 비해 변한 게 없다. 변한 게 있다면 호주를 다녀 온 나다. 하필 햄식이네 동네 근처를 가서는 햄식이처럼 사는 부유한 백인 가족들을 몇백 명 보았다. 동시에 그 나라 원주민인 애보리진이 얼마나 격리되어 있는지도 보았다. 그러고 나니 헴스워스가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라이프스타일을 광고하여 돈까지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 괴로워졌다.
헴스워스는 자기의 라이프스타일을 판다. 그가 운영하는 각종 소셜 미디어나 그가 등장하는 호주 관광청 광고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원하게 파도치는 바다, 너른 백사장, 울창하게 우거진 숲, 쿼카, 캥거루, 파랗다 못해 쨍하기까지 한 하늘. 그 속에서 서핑하는 모습, 캠프파이어 불 앞에 둘러 앉아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갓 잡은 신선한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 자연 속 캠핑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커다란 개들,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엘사와 햄식 부부까지. 그런 이미지들을 쭉 보고 있으면, 마치 호주에 가면, 그 동네에 가면, 그가 하는 걸 하면 헴스워스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헴스워스도 그걸 잘 알았는지, 본인의 트레이너며 뉴트리션들이 운동 방법을 조언해 주는 앱까지 런칭했다. 그의 트레이너가 알려주는 대로 운동하고 그의 뉴트리션이 짜 주는 대로 먹으면 마치 헴스워스처럼 될 수 있을 것만 같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앱을 다운받고 결제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바이런 베이에 산다고 해도 나는 헴스워스네처럼 살 수 없다. 내가 아시안이고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호주에서 백인 중산층의 삶은 분리되어 있다. 물론, 이론 상으로는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바이런 베이에 바다가 보이는 이층집을 사고 그 근처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정말로 가능한가? 돈을 그만큼 많이 번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거니와, 일단 그 집에 산다고 해도 그 커뮤니티에 끼기 어려울 것이다. 나 빼고 다 백인인 커뮤니티에 껴서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경험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실은 이런 가정도 무의미하다. 이런 가정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정말 이론상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호주인들의 삶이 지역과 계층, 인종에 따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예외가 몇이나 있든 간에, 전반적으로 그렇게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각자의 계층과 인종 때문에 평생을 걸쳐 겪게 되는 자잘한 경험들마저도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헴스워스의 트레이너와 뉴트리션이 조언해 준다는 운동 앱을 사용해도 나는 헴스워스처럼 될 수 없다. 그가 그 앱으로 운동해서 그 몸과 그런 행복한, 또는 행복해 보이는 삶을 갖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헴스워스의 운동 앱 광고를 보면 단순히 몸매뿐 아니라 식습관이나 몸과 마음의 건강 등 전반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광고한다). 그에겐 매일 면대면으로 함께 운동해 주는 트레이너들과 전담 영양사, 각종 관리사, 가정부와 사용인이 있으며, 고요한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데다 수영장과 스파까지 딸린 쇼핑몰 크기의 집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불하고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돈이 있다. 그의 몸매와 라이프스타일은 그런 것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젠더와 인종에서 주류이기에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평생 겪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가 덜어질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그가 그런 몸매와 생활을 광고하고 사람들이 거기에 돈을 쓰는 건, 그가 의식하고 있건 아니건 간에 그의 삶을 이루는 여러 가지의 불공평한 조건 덕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 차별적인 이러한 조건들은 그를 더더욱 부자로 만든다.
탈덕을 하기 전에도 이런 것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호주에 다녀오니 너무나 선명히 보여서 이젠 헴스워스를 볼 때마다 이게 같이 떠오를 뿐이다. 그래서 더 이상 햄식이를 덕질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 지금도 햄식이는 내 이상형이고 나도 햄식이처럼 살고 싶지만, 동시에 그를 좋아하는 것이 괴롭다.

오래 전, 호주에 살던 나는 별 생각 없이 아웃백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충격을 받았다. 애보리진을 처음 본 것이다! 호주의 '원주민'들은, 대도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3-4시간은 가야 만날 수 있었다. 그전까지 나는 호주라는 나라에 살면서도 '원주민'을 본 적도, 그들은 어디에 있나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아니, 아마도 봤지만 이민자겠거니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애보리진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한 적도 배운 적도 없으니 그들을 만나도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 사막 한복판 길거리에서 애보리진들을 '보고' 난 당황했다. 이렇게 먼 곳에 와야만 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니. 왜 이들은 대도시에는 살지 않는 거지? 그리고 탈식민주의를 공부했다. 
시간이 흐른 후, 얼마 전 다시 아웃백을 방문한 나는 애보리진이 호주에서 얼마나 격리되어 있는지를 목격하고 또 적잖이 놀랐다. 모든 사회에서 인종별로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한국인과 이주민이 사는 곳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호주 애보리진의 경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대도시에서는 정말 일부러 찾아야 두세 명 띄엄띄엄 만날 수 있고, 그들을 많이 만나려면 여전히 비행기를 타고 아웃백엘 가야 한다. 그리고 아웃백에서도 차를 타고 두세 시간을 달려, 표지판도 없는 샛길로 몇백 킬로미터를 더 가야만 애보리진 마을이 나온다. 각 마을로 가는 길은 안내문도 무엇도 없고, 그 커뮤니티에 출입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한다. 이게 격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애보리진들이 부족 별로 문화를 지키면서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마을을 이루고 산다고 했지만, 문화를 지키며 사는 방법은 그런 격리가 아니어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그걸 원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호주는 애보리진을 몰살하고 땅을 다 빼앗아 간 역사가 있는 나라다. 그런 역사와 상황 속에서 그들이 격리를 원했다고 한다면 그건 그냥 상황에 맞춰 어쩔 수 없이 내린 최선의 결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그들이 원했다는 그 말이 백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나는 곳곳에서 애보리진의 역사와 흔적을 캐묻고 다녔는데, '애보리진'을 알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애보리진을 대신해 말하는 백인들이었다.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애보리진 해설사가 있었는데도 그 옆에 백인이 붙어서 영어로 통역을 해 줬다. 그 애보리진 해설사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건 너무 명백했다. 백인과 대화할 때 그는 원어로, 백인은 영어로 말했는데도 둘이서 대화가 됐단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듣지 못하고 백인의 언어를 거쳐서 들어야만 했다. (물론 여기서 가장 문제였던 것은 내가 원어를 못 한다는 사실이었겠으나, 그것은 잠시 논외로 하자.) 백인들은 내가 애보리진에 대해 물으면 '아시안' '여성'이 애보리진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좋아했다. 그리고는 애보리진들이 정부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고 있다거나, 애보리진들이 병원을 이용하기 위해 다 대도시로 와서는 공원에서 지낸다는 둥의 말을 했다. 나를 인간이 아니라 '아시안' '여성'으로 보았던 그들이 '애보리진'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을지는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시각으로 애보리진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을 다 겪고 오니... 정말로.. 헴스워스를 볼 때마다 마냥 좋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탈덕을 하게 되었다. 탈덕을 당했다. 좋아하는 것을 맘놓고 좋아할 수가 없게 되니 너무 서럽고 속상한데 그래도 덕질이 행복하기는커녕 괴로우면 탈덕을 하는 게 맞겠지.
<미스터 선샤인>에는 "내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라는 대사가 있다고 한다. 이 대사를 두고 어느 교수님께서는 식민지 사회에서는 유용함이 곧 독이므로 무용한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셨다. 나는 그 해석을 들으며, 마블이고 헴스워스고 뭐고 강제로 탈덕을 당하고 있는 내 모습이 꼭 이 짝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며칠 전 세미나에서는 다들 좋아하던 것들로부터 강제로 탈덕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누군가가 그러니까 돌 같은 것을 좋아해 보라며 예쁜 돌 덕질을 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정말로 '무용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밀크티를 마시면 차가 중국에서부터 영국으로 건너가 밀크티가 되고, 영국인들이 차는 원래 자기네 특산품이라고 우기고, 그 밀크티가 제국주의적인 역사에 의해 퍼지고 퍼져 내게까지 왔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발레를 하다 보면 스포츠가 지독하리만큼 성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예쁜 돌도, 다이아몬드 같은 것을 생각하면 그냥 무용하지만도 않다.
좋아할 것을 마음놓고 좋아하고 싶다. 삶이 지칠 때 좋아하는 것으로 피신하면서 엔돌핀을 얻는 건데, 뭐든지 맘놓고 좋아하지도 못하니 답도 보이지 않고 괴롭기만 하다. 좋아하는 것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언론고시에서의 성차별 by 청순한 에스키모

아래 <캡틴 마블> 영화평을 쓰다, 이 블로그에도 이 글을 올려 두어야 할 것 같아서 업로드한다.




<언론고시에서의 성차별> /180620 작성

1) 이민경 작가의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라는 강연을 들었다. 같은 제목의 책을 바탕으로 한 내용인데, 여성이 경제적으로 어떤 불이익을 겪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성별 임금 격차라고 하면 보통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떠올리는데, 그게 아니라 동일 직급의 여성과남성은 능력이 같은가부터 떠올려 보자고 하며 강연은 시작됐다. 답은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직급이라면,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여성이 그 직급에 다다르려면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하고 훨씬 더 많은 것을 증명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급이 같은 여성과 남성이 있고 그들의 임금 격차가 삼백만 원이라고 했을 때, 실제 임금 격차는 삼백만 원이 아니라 삼백만 원+a 이다. 그 여성이 남성이었다면 그 직급에 머물지 않고 더 위로 올라가서 더 많은 임금을 받았을 것이므로. 이는 승진뿐 아니라 취업, 진학, 진로 선택 등 한 사람의 인생 전반에 걸쳐 작동한다.

2) 이 대목을 들으니 언론고시가 떠올랐다. 나는 일 년 반 동안 피디 시험을 준비했고, 모두 불합격했다. 필기 시험과 인성 검사를 함께 보는 2차 전형을 통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자괴감에 빠졌다.

그런데 그게 과연 순전히 내 능력 부족 때문이었을까? 내가 저널리즘스쿨에 다니던 해, 우리 반에는 여성의 수가 남성의 두 배 정도였다. 우리 반까지 갈 것도 없다. 그냥 언론고시 지망생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합격자를 보면 남성이 더 많다. 그해 우리 반에서도 남성은 전원 합격, 여성은 한 명만 합격했다. 그리고 같은 해, SBS는 열한 명을 뽑으면서 여성을 단 두 명 뽑았다. 그나마도 그중 한 명은 원래 여성과 남성을 각각 한 명씩 뽑겠다고 공지한 분야였다.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여성을 한 명 뽑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3) 그해 언론고시 카페에서 본 글 두 편을 기억한다. 둘 다 비슷한 구조를 지적하고 있지만 ,댓글의 반응은 상반됐었다. 첫 번째 글은 학벌 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언론고시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말이 있다. '덮어 놓고 뽑아 보니 다 서울대더라'. 학벌 블라인드 채용을 해도 뽑히는 사람은 다 명문대생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명문대생이 그만큼 능력이 좋다는 의미로 종종 쓰였다. 그 글은 이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 명문대생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합격하는 것은 아니라고. 명문대생과 비명문대생 사이에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너무 차이가 난다고. 선배 중에 합격한 사람이 많고, 그 사람이 종종 학교에 와서 강연도 해 주고, 합격한 글은 어떤 글인지 자주 보고, 합격 데이터가 쌓인 언론고시반에서 면접 멘토링도 해 주는 환경에서 공부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댓글에는 동조하는 의견이 많았다.

두 번째 글은 성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SBS가 11명 중 2명을 뽑은 직후에 올라온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성차별이라고. 그러나 이 글에는 반박하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남성이 많이 뽑힌 것은 성차별이 아니라 뽑힌 남성들의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거라는 논리였다. 학벌 차별에 대해서는 동조했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성차별 이야기가 나오니까 능력주의에 철석같은 믿음을 보였을까?

능력이 뛰어나서 뽑힌 거라고? 능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거라고? 이 말은 너무도 단순한 진리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학벌이 좋지 않아서 대기업은 꿈도 꿀 수 없다거나, 흙수저라서, 혹은 연고가 없어서 안 된다는 식의 말을 떠올려 보라.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개인의 능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성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4) ’뛰어난' 지원자를 판단하는 문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뛰어난’ 지원자는 어떤 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일까?

PD 시험은 보통 스펙과 자소서로 판단하는 서류 전형, 작문과 인성 시험으로 구성된 필기시험, 그리고 면접 전형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서 주관이 반영되지 않는 것은 1단계 서류 전형뿐이다. 면접 전형에서 성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은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필기시험까지는 여자가 많았는데 면접 치르고 뽑힌 사람은 다 남자더라, 하는 식의 말을 한 번쯤은 다들 들어 봤을 것이다. 실제로 2014년 경향신문 신입 기자 채용 과정에서 면접 시 성차별을 겪은 지원자가 항의했고, 이 일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까지 들어간 적이 있다. 면접 전형은 성차별이 일어나기 너무 쉬운 곳이며, 실제로 면접관의 성비 구성에서부터 성별에 따라 피면접자에게 주어지는 질문의 질이나 태도가 달라지는 것까지, 교묘하고도 다양하게 성차별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기사를 조금만 검색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2단계 필기시험에는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을까? 필기시험은 보통 작문과 인성 시험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작문부터 짚어 보자. 글을 평가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라, 아무리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해도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일정 수준만 넘기면 그중에 더 잘 쓴 글을 가려내는 것은 결국 취향의 문제다. 논술형 글이 아닌 작문은 더더욱 그렇다. 소재 선택에서부터 글의 전개 방식, 결론에 이르기까지 평가자는 자기 입맛에 맞는 글을 고르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평가자는 누구인가? 현직 PD다. 그리고 현직 PD는 대부분 남성이다.*

인성검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회사가 인성검사를 통해 어떤 사람을 뽑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막연히 회사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골라내겠거니 하면서 시험을 치러 왔다. 그런데 이 ‘회사의 입맛에 맞는 사람’에 남성이 더 많다는 것이 문제다.

5)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 사회는 갓난아기 때부터 여성과 남성에게 각각 다른 성 역할을 부여하고, 그것을 장려하며 그에 부합하지 않은 행동을 교정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여자애가… 좀 얌전해져라’, ‘나대지 마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이 같은 말은, 내뱉을 때는 고작 한두 마디이기에 별 힘이 없을 것 같지만, 듣는 사람 처지에서는 갓난아기 때부터 평생에 걸쳐 지속해서 듣게 되는 것이므로 영향력이 크다. 이런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해당 방향으로 행동을 교정하게 되고, 그에 따라 취향과 성향, 성격도 바뀌게 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그림을 많이 봐 왔다. 학교에서, 학급에서 여성이 부회장, 남성이 회장을 맡는 그림을 떠올려 보라. 너무도 자연스럽지 않은가? 이는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까지 쭉 이어진다. 이러한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행동은 얌전히, 나대지 않으며 남성을 보조하는 일이다. 즉, 여성인 내가 들어야만 했던 ‘얌전해져라’, ‘나대지 마라’는 말은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직급에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사회는 똑 부러지게 자기주장 하는 여성을 견디지 못한다. 못 믿겠다고?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녹색당 신지예 후보를 두고 ‘개시건방지다’고 지적’질’했던 박훈 변호사의 포스팅을 아직도 안 읽어 봤는가?

이것은 너무도 오묘해서 가려내기 어려운 차별이다. 그러나 그만큼 깊숙이 우리를 지배하며 차별을 공고히 하고 있다. 왜 남성이 더 많이 승진할까? 왜 필기시험에서, 인성검사에서, 면접 전형에서, 이 밖의 다양하고 사소한 일상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될까? 왜 여성은 남성보다 저임금을 받는 진로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을까?… 이런 질문들 모두 위에서 설명한 성 역할에 따른 행동 교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6) 자, 그럼 설명을 해 보자. 왜 남성이 더 쉽게, 많이, 빨리 승진하는가? 답은 놀랍게도 ‘그냥’이다. 여성이 승진 점수가 다 찼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자연스러우니까’, ‘이게 순서인 것 같아서’ 남성을 먼저 승진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남성이 먼저 승진하는 것은 왜 자연스러울까? 바로 우리가 어려서부터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위치(부회장과 회장)에 있는 것만을 봐 왔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 직급에 있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어딘지 어색하고, 고치고 싶어진다.

남성의 승진 점수가 더 높아서 남성이 먼저 승진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왜 남성의 승진 점수가 더 빨리 채워질까? 남성에게 중요한 기회를 먼저 주기 때문이다. 왜 남성에게 중요한 기회를 먼저 줄까? 그게 자연스러우니까. 답은 또 ‘그냥’이다.

회식이나 상사에게 어필하는 자리에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이 참석한다. 그래서 남성은 더 빨리 승진한다. 그렇다면 왜 여성은 그런 자리에 남성보다 덜 나올까? 익숙하지 않아서다. 왜 여성은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많이 해 보지 않아서다. 윗사람에게 어필했을 때 그게 받아들여진 기억도 별로 없다. 불편하고 어색하다. 답은 또 ‘그냥’이다. (룸살롱 문화나 육아 문제 등 남성 중심적인 회식 문화의 영향 역시 크겠으나 여기서는 그 문제는 제외하고 생각한다.)

여성은 왜 저임금 직종을 선택하는 경향이 높을까? 많은 여성이 ‘내가 원해서’, ‘정말 그 일이 좋아서’ 저임금 직종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성이 그 일을 원하게 되는 과정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여성에게 적합한 직종, 남성에게 적합한 직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말로는 누구든지 어떤 직업이든지 가질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실제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간호사’를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여성이고, ‘의사’를 떠올렸을 때 그려지는 그림은 남성이다. 여자아이가 ‘의사가 될 거야’, 혹은 ‘기계공학자가 될 거야’라고 마음을 먹으려면 사고방식의 길을 한 번 틀어야 한다. 그건 부자연스러운 그림이니까. 그 아이가 자라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학과를 선택할 때? 괜히 교대를 기웃거려 본다. ‘여자라면 교사가 최고지’라는 ‘자연스러운’ 인식 때문이다. 전교 1등 여학생이 교대에 하향지원했다는 말은 너무도 흔하게 들려 온다. 전교 1등 남학생이 교대에 하향지원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하는 선택 하나하나에 성별에 따른 제약이 걸린다. 이런 선택이 모여 성격을, 성향을, 취향을 바꾼다. 결국 여성인 ‘나’는 내 삶이, 내 진로가 나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내 선택은 사실 오롯이 나만이 내린 결정이 아니다. 나는 사회에서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은 선택지를 소거법으로 다 지우고 나서 남은 것 중에 최선을 고른 것이다. 여성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고임금 대신 저임금 직장으로 진로를 택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승진과 먼 행동(상사에게 어필하지 않는 것 등)을 한다. 그에 따라 사회는 ‘자연스럽게’ 여성이 많은 직군을 저임금으로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여성을 승진 대상에서 배제한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7) 언론고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면접 전형뿐 아니라,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필기시험과 인성검사에서도 뽑히는 글, 뽑히는 성격(?)과 성별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 뽑히는 글을 쓰는 사람, 뽑히는 성격을 지닌 사람은 남성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성별에 따라 성격과 행동, 사고방식을 교정 당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나온 글과 성격 역시 성별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지원자들은 자기가 선택한 소재로 자기가 선택한 전개 방식을 통해 글을 쓰겠지만, 여성과 남성이 선택한 소재나 전개 방식은 다를 것이다. 애초에 서로 다른 사람으로 길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남성이 더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길러졌으므로, 당연히 남성이 쓴 글과 남성의 성격이 더 일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확률이 높다.

둘째, 글을 평가하는 현직 PD들의 취향, 성격, 사고방식 역시 남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급했듯이, 여성 PD보다 남성 PD가 더 많다. 이들 모두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남성에게 부여된 성 역할에 따라 행동 양식을 교정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들의 행동뿐 아니라 사고방식, 성격, 취향도 모두 성별과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이들이 좋다고 평가하는 글은 어느 정도 성별에 영향을 받았을 수밖에 없다.

8) 언론고시에 매진하던 시절, PD, 기자 선생님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남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고 여학생들은 여학생들끼리 앉았던 기억이 있다. 이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도 아니었고 오히려 여학생들이 선생님들과 마주 보며 앉기를 부담스러워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도 그랬다. 여학생들끼리도 ‘뭐야, 우리 왜 이렇게 앉았어?’ 하면서도 ‘그래도 선생님들하고 같이 앉는 건 부담스러우니까… ㅎㅎ’ 하며 그러려니 했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것 역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학습의 결과였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런 자리를 불편하게 여기게 자란 여성들, 반대로 그런 자리를 비교적 편하게 여기게 자란 남성들. 물론 선생님(사실 미래의 상사다)과 마주 보며 식사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여성도 있을 것이고, 불편하게 여기는 남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대체로 그런 자리를 불편해하고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편해하는 것은 성별에 따른 학습 결과라고 해석된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상사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면 멀리 떨어져서 식사할 때보다 더 승진 기회에 가까워진다.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이렇게 여성들은 작은 문제에서부터 고임금과 멀어진다.

9) 나는 종종,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다. 한국의 기형적인 교육 제도와 획일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 과도하게 학업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랐더라면, 다양성을 장려하는 사회에서 자랐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곤 억울해진다.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다른 곳에서 자랐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이민경 작가가 강연에서 말했듯이, 강연에 안 온 사람 수를 세는 것과 같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얌전해져라’, ‘나대지 마라’는 말을 듣지 않고 자랐더라면. 내가 여자가 부회장을 하고 남자가 회장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여성학을 했을까. 그랬다면 나는 PD가 되겠다고 언론고시에 뛰어들었을까. 그랬다면 나는 시를 썼을까. 그랬다면 나는…… 이것 역시 알 수가 없다. 내가 빼앗긴 줄도 모른 채 빼앗긴 기회를 애초에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카를 마르크스는 계급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고 했고,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그런 세계를 겪어 본 적이 없기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 역시 말한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 모든 기회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10) 강연이 끝나고 나는 언론고시의 경험을 언급하며 질문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안 보이는’ 임금을 보이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것이 루저의 징징거림 따위로 치부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이민경 작가는 대답했다. 담론을 형성하자고. 나의 언론고시 경험, 작가의 통번역대학원 경험과 같은 개개인의 경험을 모으고 이야기하자고. 그리고 누가 루저가 되는지, 즉 누가 지고 누가 이기는지에 주목하자고. 이전에는 ‘가사노동’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는데 만들어낸 것처럼, 이 문제도 담론을 만들어서 바꿀 수 있다고.

강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겪은 언론고시 문제에 있어서 만이라도 성별 격차를 반드시 가시화하겠다고. 이걸 담론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언론고시를 겪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 하나하나가 모이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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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2003)에 따르면, 지상파 3사 정규직 인원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0.08%이다. 이 연구는 2003년에 이뤄진 것이므로 현재와 차이가 있겠으나, 2016년 SBS 합격자 성비가 9:2인 것을 보면 크게 달라졌으리라는 기대는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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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2월, 아래의 글을 덧붙였다.)


지금의 나는 무엇이 임금 격차를 절대적인 문제로 만드는지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언론고시에서 성차별을 없애기, 그래서 피디를 꿈꾸는 여성들이 성별 때문에 차별받지 않고 자기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 피디가 되기, 그래서 비정규직의 임금이 아니라 정규직의 임금을 받기.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페미니즘의 중간 기착지이지, 종착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평생 여성으로 길러지면서 갖게 되는 취향과 습관, 말투, 사고방식 같은 것들이 자원이 되어 결과적으로 그를 고소득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우리는 그가 성별 체계의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떤 사람으로 자랐을까를 상상해야 한다. 그를 통해 "잃어버린" 임금을 생각하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왜 고소득 일자리에서는 특정한 취향, 습관, 말투,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요구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그를 통해 사회가 어떤 가치관을 권장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나아가, 왜 고소득 일자리는 그렇게나 소수인지, 왜 그 고소득 일자리를 얻지 않으면 삶이 그렇게나 어려워지는지, 왜 이미 더 잘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잘 해야만 하는지, 어째서 사회는 우리에게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원을 보장하지 않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런 것들과 페미니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고소득 일자리 같은 자원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위로의 분배"를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인다(리사 듀건(2003)을 참조하시오!). 나이키 같은 초국가적 대기업이 페미니즘을 마케팅에 이용해 여성들로 하여금 돈을 쓰게 만드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돈을 쓰지 못하는 여성은 나이키의 친구가 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돈을 쓰는 자라면 누구든 친구로 받아들인다. 여성이든 동성애자든 난민이든 어떤 정체성 집단이든, 현존하는 계급 정치를 받아들이면, 현존하는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받아들이면, 지금의 주류적 가치를 받아들이면 시민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류적 가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차별을 만들어 낸 체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아래의 글에서 보았듯이, 고소득 일자리는 특정한 취향, 습관, 말투,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특성들은 남성일수록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얻게 되기 쉽다. 즉, 이미 사회 구조 자체가 여성이 자원을 얻기 더 어렵게 되어 있는데 그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 여성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만 한다면 결과적으로 바뀌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드리 로드가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시스터 아웃사이더>,178)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니 대중적 페미니즘 담론에서 “야망보지”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우려스럽다. 물론 능력주의 사회를 당장 깰 수 없고, 능력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성별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므로 “야망보지”들도 필요하다. 나 또한 더 많은 여성이 고위직에 오르고 고소득 일자리를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야망이 현재의 계급 구조나 가치관을 그대로 둔 상황에서 남보다 더 잘 해서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성은 어떤 여성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소득 일자리가 요구하는 취향, 습관, 말투, 사고방식은 어떤 여성일수록 얻기 쉬운가? 능력주의 자체가 이미 성별화되어 있는데 여성 몇 사람이 혼자서만 위로 올라간다면 그가 맞닥뜨릴 사회는 어떤 모습이겠는가? 그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억압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캡틴 마블>: 한계는 없다 by 청순한 에스키모

세계 여성의 날에 <캡틴 마블> 영화평을 쓴다. 사실 영화는 개봉 당일 오전에 달려가서 봤다. 보면서 가장 전율했던 장면에서부터 이 글을 시작할까 한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치 않으면 뒤로 가길 바란다. 괜히 봐 놓고 징징대면 "어쩌라고?" 입니다.







"나는 여태껏 한쪽 팔이 등 뒤에 묶인 채로 싸워 왔는데, 만약에 내가 자유로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캐롤 댄버스는 이 말을 하며 캡틴 마블로 각성한다. 넌 자동차 못 타, 넌 조종사 못 돼, 넌 너무 약해, 넌 너무 감정적이야. 캐롤이 어려서부터, 그리고 크리 전사로 개조당해서까지 계속 들어야 했던 말이다. 이 말들은 캐롤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결국 그의 팔을 칭칭 묶어 놓았다. 이런 말들이 가스라이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캐롤은 그래서 각성하게 된다. 사실은 자동차도 탈 수 있고, 조종사도 될 수 있고, 훈련하면 강해질 수 있고, 감정은 억눌러 없애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싸우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고서 캐롤은 자유를 얻는다. 그동안 자기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저 남들이 했던 말에 불과했다는 걸 캡틴 마블은 점차 깨닫는다. 하늘에서 떨어져서 당황하던 캐롤이 '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서 날아 보니까 날아졌던 장면이 이를 보여준다.

현실 세계의 여성들 역시 캐롤이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들을 평생 듣는다. 여자들은 약하지, 여자들은 감정적이야, 여자들은 남자한테 사랑받는 게 최고야, 여자에게 최고의 행복은 임신이지, 여자가 공부 많이 해서 뭐 해? 여자가, 여자가... 이런 말들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여성은 없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한두 번 하는 사람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이 말을 평생 들어 오기 때문에 자의식에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다. 여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진심으로 믿게 된다.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한 젊은 여성도 빼빼 마른 70대 남성을 힘으로는 못 이긴다고, 여자들은 질투심이 많고 서로 위할 줄 모른다고, 감정은 일하는 데, 아니 스크럴족이랑 싸우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그러니 더 공부할 수 있어도 눈을 낮춰 시집 가는 게 좋고, 양팔에서 바주카포 같은 걸 쏠 수 있어도 안 쏘고 주먹으로만 싸우는 게 좋은 거라고.

작년에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를 쓴 이민경 작가의 강연을 들으러 갔던 게 생각났다. 그 때 다녀와서 쓴 글을 이 블로그에도 올려 둘 테니, 이 글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 그리고 언론고시에서의 성차별을 적나라하게 보고 싶다면 그 글을 읽기 바란다. 아무튼, 강연의 내용은 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임금을 적게 받고 있는지에 관한 분석이었다. 처음에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실 동일한 노동을 하는 여성과 남성은 스펙이 같지 않다고. 거기서부터 여성들은 이미 임금을 잃기 시작하는 거다. 강연은 그런 식으로 여성을 저임금에 빠지게 하는 사회 구조 및 문화를 쭉쭉 짚어 나가다가, 마지막엔 여기까지 짚었다. 여성들은 그럼 왜 저임금 직종을 '자발적으로' 선택할까? 답은 이거였다. 여성들이 태어나서부터 평생 여성으로 '길러'지면서 갖게 되는 취향, 생각, 습관 같은 사소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여성 스스로가 저임금에 가까워지는 취향, 생각, 습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캐롤은 자동차를 빠르게 몰고 싶어했고, 조종사가 되고 싶어했고,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어했지만 평생 '넌 안 된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물론 우리의 캐롤은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 결국 캡틴 마블이 되었지만, 현실 세계의 여성들이 모두 캐롤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특정 방향으로 행동을 교정당하게 되면 결국 어느 정도 그 쪽으로 가게 마련이다. 

캐롤 댄버스의 가능성은 그가 평생 들어야 했던 말들에 의해 억눌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가 자길 쓰러뜨려도, 넘어뜨려도, 온몸을 칭칭 감아도 일어나고 또 일어난다. 그리고 결국 자기의 가능성을 완전히 펼쳐 낸다. 캡틴 마블이 된다.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원래 어떻게 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우리 엄마는, 내 친구는, 오늘 길에서 스친 여성은 억압이 없었더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우리는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도 아니고 바주카포도 없어서 '증명해 보라'는 개소리를 펑펑 날려 버릴 수도 없으니, 우리의 잠재성이 어디까지였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이 논리는 인간이 환경과 무관하게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며, 이는 논쟁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글에서는 그 생각은 논외로 한다. That's not the point.)

현실이 어찌 되었건, 이 영화는 캐롤이 그동안 여자라서 차야만 했던 사슬을 끊어 버리고 캡틴 마블이 되었다는 걸 보여준 것만으로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난 여성 히어로가 없다는 점을 머릿속으론 문제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가슴으론 막 크게 아쉬워하진 않았다. 나는 마블 덕후이고 토르랑 로키만 봐도 뽕이 찼으니까. 그런데 <캡틴 마블> 보면서 알았다. 여성 히어로 없는 거, 엄청나게 문제다. 영화 보고 나서 그동안 남자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어서 약간 어이가 없었다. 난 토르랑 로키가 아무리 좋아도 영화 보면서 걔네랑 동일시되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거든. 그런데 이거 보면서는 내가 캐롤 같고 캐롤이 나 같아서 영화 내내 얼마나 전율했는지 모른다. 캐롤처럼 살 거다. 자, 날 쓰러뜨려 봐라. 넘어뜨려 봐라. 내 팔을 칭칭 묶어 봐라. 나는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다시 또 일어날테니 말이다. 영화 보고 나서부터 운동도 더 열심히 하게 됐다니까. 난 강해질거고, 한계 없이 강해질 거다!



+) 아, 자막 얘기 하는 걸 잊었다. 누가 번역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자막이 정말 구리다. 사실 난 마블 시리즈 자막이 항상 너무나 상상 이상으로 구리기 때문에 마블은 웬만하면 자막 신경 안 쓰고 거의 귀로 듣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했는데, 한참 보다가 잠깐 이해 안 가는 게 있어서 자막을 봤다. 그리고 캐붕을 겪었다. 오, 캐롤이 왜 욘로그한테 존댓말을 쓰지? 보스니까 그렇다고? 그렇게 안일하게 번역하지 마라. 캐롤이 어디 욘로그가 보스라고 존댓말 쓸 것 같은 캐릭터인가? 귀로 들으면서 봤을 때는 캐롤하고 욘로그가 서로에게 반말하는 걸로 그려졌는데 갑자기 자막에서 캐롤이 존댓말 쓰는 걸 봤을 때 어찌나 어색하던지. 그냥 봤을 땐 둘이 동등한 전우처럼 보였는데 자막을 보니까 갑자기 캐롤이 그렇게 약하고 낮아 보일 수가 없었다. 번역 다시 해라. 원어를 들어 보면 캐롤과 욘로그는 서로에게 동등하게 평어를 쓰고 있다.
하나 더. 번역에서 she나 her이 나올 때 '여자'라고 번역하던데, he나 him을 '남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여자가~', '이 여자를~' 같은 말들. <스카이캐슬> 볼 때도 이런 대사가 너무 많아서 계속 거슬렸는데 여기 번역에서도 그랬다. 영어는 원래 여성대명사와 남성대명사가 나뉘어 있는 언어고, 그래서 맥락상 대상의 성별이 강조된 게 아니면 굳이 우리말 번역에서 성별을 지칭할 필요가 없다. 우리말은 원래가 성별이 없는 언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냥 '사람'으로 번역해도 되고, 사실 대부분의 경우엔 그냥 '여자'라는 단어를 빼도 말이 된다. 근데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지 알아? 남자는 사람이고 여자는 여자로 인식해서 그렇다. 아휴... 자막을 많이 안 봐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만 봐도 전체적인 번역 퀄이 어떤지 알겠다. 아마 말이 많이 나올 것 같다.

2달러 by 청순한 에스키모

아웃백으로 떠나던 날이었다. 아침 8시까지는 공항에 가야 했고, 전날 묵은 친구 집에서 공항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친구네 동네에서 공항엘 가려면 일단 씨티까지 트레인을 타고 가서 거기서 공항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그날따라 하필 트레인도 공사 중이어서 빙빙 돌아가는 트램을 타야 했다. 그래서 새벽 6시부터 집을 나섰다. 한 시간 동안 멜번 교외를 돈 후 드디어 씨티 도착. 하지만 공항버스 타는 곳까지 가려면 트램을 또 갈아타야 했다. 엄청난 저녁형 인간인 내게 새벽 6시는 너무나도 이른 시간이었기에 난 벌써 지쳐 있었다. 배낭도 무거웠고, 또 그날 아침은 쌀쌀하기까지 해서 약간 비참한 기분이었다. 얼른 앨리스 스프링스에 도착해서 누워 있고만 싶었다. 침대 생각만 가득한 채로, 나는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겨 트램 스테이션에 털썩 내려앉았다. 그 일은 바로 그 때 일어났다.

 

엉키고 떡진 긴 머리, 덥수룩한 수염, 헤진 옷과 마른 몸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선 말했다. 실례합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경계의 눈초리를 띠고 있었을 것이다. 해는 떠 있었어도 가게 문은 편의점 빼고는 다 닫혀 있는 이른 아침이었고, 나는 체구도 작고 혼자였기에 조금 무서웠다. 그는 물었다. 2달러를 주실 수 있나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안합니다, 하고 웅얼거렸다. 돈을 안 준다고 내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나 두려운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분노도 실망도 체념도, 그 어떤 감정도 띄우지 않은 채 내 맞은편에 앉은 사람에게로 갔다. 그리고 같은 것을 물었다.

 

맞은편 사람도 2달러를 주지 않았고, 그는 그 옆 사람에게로 갔다. 그리고 그 옆 사람, 그 옆의 사람, 그 앞의 사람, 그 건너편의 사람에게로 갔다. 아무도 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아무 표정 없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건너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2달러를 주실 수 있나요. 마치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라거나 바지가 예쁘네요, 또는 길 좀 묻겠습니다, 같은 말투였다. 아뇨, 미안합니다, 그리고 꾹 다물린 입술을 지나며 그는 점점 멀어졌고, 마침내 코너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트램이 언제 오나 전광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였다. 그가 저 멀리서 다시 나타나 이 쪽을 향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반바지에 하늘색 티셔츠를 입은 할아버지와 함께였다. 나는 그가 일행을 데려왔겠거니 생각하며 그쪽을 곁눈질했다. 그들이 점점 가까워졌고, 나는 그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빵을 하나 사 줄 테니까 이 2달러로는 다른 걸 해요." 할아버지를 뒤따라 오던 그는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들은 함께 트램 스테이션 뒤쪽의 세븐일레븐 편의점으로 가고 있던 거였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고, 그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빵을 들고 나와 그에게 건넸고, 그는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다른 쪽으로 걸어갔고, 그는 예의 그 표정 없는 얼굴로 트램 스테이션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앉았다. 아까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에 앉아 빵을 먹었다.

 

2달러. 사실 2달러는 나에게도 있었는데. 나는 전날 저녁에 버스킹하는 사람에게 2달러를 주었다. 내게 2달러는 그런 돈이었다. 길을 걷다 마주친 음색에 전율했을 때 주머니를 뒤적여 꺼내는 동전. '2달러만 추가하면 더 좋은 숙소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추가하시겠습니까?' 팝업에 약간 망설이다 누르는 체크 버튼. 커피 한 잔도 못 마시는 푼돈. 포케나 서브웨이를 먹을 때 아보카도와 음료수를 추가하려면 필요한 숫자. ATM 수수료. 그러나 그날 만난 그에게 2달러는, 있으면 아침밥을 먹을 수 있고 없으면 굶어야 하는 돈이었다. 그러니까 생존이었던 셈이다.

 

나는 생각했다. 왜 누군가는 2달러도 없어서 굶어야 하고 누군가는 2억 달러를 가진 게 이렇게나 당연하지? 빈부격차는 누구나 아는 거라서 얘깃거리도 안 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이 불평등을 모두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 2달러 어쩌고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얘기다. 우리는 안다. 누군가는 2달러가 없고, 누군가에게 2달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냥 한 번쯤 생각한다. , 빈부격차는 정말 문제야.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대. 그리고선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당장 내 밥벌이가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글을 쓰게 만든 건 그의 태도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2달러를 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던 태도, 경계심 가득했을 내 눈초리와 연이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작은 실망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 너무나도 무미건조하게 들렸던 목소리까지.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낯선 이에게 돈 달라고 하는 건 사실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그 사람이라고 처음부터 그 일이 쉬웠을 리 없다. 그가 그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되기까지 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는 어떤 이유로, 어쩌다가, 2달러가 없게 되었을까. 확실한 건, 흔한 편견처럼 그가 게을러서라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을 거라는 것이다. 내가 특별히 부지런하거나 뭘 많이 노력해서 여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상상하다가 그만 트램을 놓칠 뻔했다. 목이 메어 와 침을 꿀꺽 삼키며, 나는 얼른 트램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비행기에서 스피박과 버틀러의 대담집인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Who Sings the Nation-State?>를 읽었다. 대담에서 두 학자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을 언급하면서, 국민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거라고 했다. 이 정의에 의하면 호주라는 나라는 2달러가 없었던 그에게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하고 있으므로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사실 그 정의를 따른다면 국가다운 국가는 없는 셈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정의가 무의미한 건 아니다. 오히려 질문해야 할 것은 어째서 현재 지구상의 국가들은 국민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가이다. 왜 누군가는 타인에게 2달러를 달라고 하는 것이 일상이어야 하는가? 왜 누군가는 남들보다 뒤처지면 생존이 불가능할 거라는 두려움을 안고 평생을 경쟁해야 하는가? 왜 누군가는 그냥 사람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특정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가? 왜 누군가가 옷을 싸게 구매할수록 그 옷을 만드는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가? 왜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다른 국가로 떠나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하는가?


애인, 관계, 섹슈얼리티 by 청순한 에스키모

요새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누구를 소개해 준다고 하면 나는 아마도 거절할 것이다. 내가 "한국식 연애"라고 이름 붙인, 그 연애가 싫어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마음껏 연애해도 좋아' 허가증 같은 것을 받은 지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아, 잠깐. 다르게 써야 할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 이 사회가 주는 허가증은 저게 아니라 '이제 연애해야 해!'에 더 가깝다. 고등학교 시절에 연애를 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로부터 발랑 까진 애라거나 공부엔 관심 없는 애 정도로 취급됐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젠 연애를 안 하면 어딘가 하자 있는 애로 취급됐으니까. 나는 대학엘 입학하기도 전부터 연애 좀 해 보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누굴 좋아한 마음보다 하자 있는 애가 되기 싫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첫 타깃은 성당에서 같이 연극을 올리던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와 빨리 사귀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다시 말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를 좋아해서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보다는 빨리 '모솔 딱지'를 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그 당시 내가 알던 사람 중 가장 '남친감'으로 괜찮은 사람이었고, 그가 내게 사귀자고만 하면 나는 얼른 달려가 친구들에게 나 남자 친구 생겼다고 자랑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연애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도 여자 친구 역할을 해야 했기에, 나는 샤랄라한 스커트를 사 입고 하이힐을 신고 청순해 보이는 화장을 하겠다며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식으로 몇 년을 살았다. 미팅, 소개팅, 동아리, 친구의 친구 등등 온갖 방법으로 사람을 만났고 그중 몇 명과는 '연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중 내 삶에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둘 중 하나였다. 내가 빨리 '연애 관계'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을 내다가 그게 안 돼서 자폭하거나, 빨리 '연애 관계'에 들어갔지만 막상 사귀게 되니 내가 갑갑해서 또 자폭한 경우. 연애 상대로 찍어 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술을 마시며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이 the one이 아닌가 보다. 때가 되면 만나게 되겠지. 그럼 내가 기대했던,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하려고 했던 게 다 역할극이고 연기였다는 걸 깨달은 건 또 몇 년이 지나고, 몇 명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 본 이후였다. 이젠 안다. 난 누군가와 헌신적인 관계에 들어가기까지 좀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소개팅 후 몇 번의 '애프터'를 거치고 바로 '사귀게' 되는 그런 방식은 나한테는 맞지가 않다. 아직 이 사람이 식사할 때 어떤 습관이 있는지, 자고 일어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짜증 나게 굴 때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우울할 땐 어떻게 구는지, 내가 우울할 때와 내가 짜증 날 땐 날 어떻게 대해 주는지, 그런 걸 알지도 못한 채 갑자기 하루 종일 끊임없이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하고, 하루 끝에 전화를 걸지 않으면,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지 않으면, 친구들보다 그를 우선시하지 않으면 이상한 관계가 되는 건 부담스럽다. 난 누군가와 오랫동안 데이트를 하고 나야 그에게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지지도 않은 채 "여자 친구"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하는 건 너무너무 어색한 일이다. 그걸 깨달은 이후엔 연애하고 싶다는 말을 어디 가서 쉽게 내뱉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연애'와 내가 생각하는 '연애'가 다르니까.



그럼 난 뭘 원하는가? 지금,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는 뭘 원하는 걸까? 


지금의 나는 헌신적인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냥 적당히 끌리는 사람과 맛있는 술을 마시며 대화하고, 그의 괜찮은 외모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고, 그의 근사한 눈썹 뼈와 콧날 같은 걸 어루만지고, 서로 끌어안고, 그러다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하러 가고, 그런 걸 원한다. '그'가 한 사람일 필요도 없다. 난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 게 좋다. 그러다가 그중 한 사람과 좀 더 헌신적이고 독점적인 관계가 맺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거고, 아니면 말고.


오픈 릴레이션십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내 섹슈얼리티를 뭐라고 정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현존하는 구분 속에 들어가야 한다면 나는 폴리섹슈얼에 가까운 것 같다. 다양한 사람과 섹슈얼한 관계를 맺고 싶은 나. 다른 건 다 왔다 갔다 해도 그건 거의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이야길 하면 주변 사람들은 내게 질투 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질투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일대일의 이성애 관계가 규범이 아닌 사회에서도 질투가 자연스러운 감정일까? 물론 나도 질투를 느낀 적이 있다. 언젠가 과거의 애인 A가 나를 동행하지 않고 파티에 갔었는데, 거기서 찍힌 사진이 며칠 후 그의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그가 올린 것도 아니고 같이 있던 사람이 그를 태그한 거였다. 그런데 그 사진에서 그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너무나 인기가 많아 보이는 거였다. 그는 마치 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순간 나는 그가 나를 떠나 사진 속 누군가에게 갈까 봐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일대일 관계만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내가 파티에 동행하지 못했던 것이, 즉 그의 일대일 관계를 꿰차지 못했던 것이 질투를 불러일으켰던 게 아닐까?


A는 여태껏 만났던 사람 중 내가 가장 사랑했고 헌신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만나는 동안 계속 다른 사람도 만나고 싶은 유혹을 견뎌내야 했다. 내가 그를 덜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나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게 좋고, 상대방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뿐이다.



내가 내 섹슈얼리티를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적어도 한국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세상 어느 곳이 안 그렇겠느냐마는, 특히나 한국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연애하는 사람이 더더욱 없는 것 같다. 일대일의 이성애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섹슈얼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가 오면 좋겠다. 이상한 사람이나 비윤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고서도 내가 '나'인 채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그래서 내겐 공부가 생존의 문제다. 행복하게 살려면 계속 공부해야지 어떡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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